한국 백세인의 당당한 삶
장수의학자 박상철 교수의 백세인 이야기

일러스트 ⓒ 헬시에이징 뉴스 (AI 기반 제작)
우리는 흔히 백 살까지 산 사람들은 남다른 생의 집념이나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마주한 백세인들의 모습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곁을 지키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심지어 배우자나 자식마저 먼저 보낸 뒤 홀로 남겨진 고독 속에서도 그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을 대범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이면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지켜내려는 강인하고도 눈물겨운 '생명의 의지'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의 한 마을에서 만난 105세 구상위 할머니는 그 강인함을 몸소 보여주는 분이었습니다. 백 세가 넘은 독거노인이 상당수 있지만 구 할머니의 상황은 유독 특별했습니다. 무릎이 불편해 거의 기어 다녀야 하는 처지임에도 할머니는 혼자만의 삶을 일궈가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세월이 흘러 청각은 어두워졌을지언정, 스스로를 가꾸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밝았다는 사실입니다. "나, 머리 좀 깎아줘"라며 이웃에게 매무새를 부탁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감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할머니의 일상은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로 채워집니다. 여든이 넘은 마을 이장이 매일 들러 먹거리를 챙기고 설거지를 돕는 풍경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고령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 모델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전통사회에서의 향약을 지켜온 두레정신이 살아있는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웃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내가 꼭 죽어야 하는디... 그래서 안 묵어야 하는디..."라며 읊조리는 자조적인 미소 속에는 자신이 오래 사는 것이 이웃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는 깊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덧붙입니다. "그래도 기어서라도 정지(부엌) 가서 묵게 돼." 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입맛이 좋아서도, 욕심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부엌으로 기어가 밥을 챙겨 먹는 그 본능적인 행위는,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가장 경건하고도 모진 '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구 할머니의 사례는 우리에게 '삶의 의지'란 거창한 구호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비록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야 할지라도 스스로 한 끼를 찾아 먹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주변의 도움에 감사하며 자신의 외양을 정갈히 가꾸는 마음입니다. 백세인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 찾아오는 '살아있음'의 본능에 얼마나 경건하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생명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할머니의 삶은, 모진 목숨을 탓하면서도 끝내 생의 끈을 놓지 않는 생명의 숭고한 승전보와 같습니다.
기고자 / 박상철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박상철
출처 : 헬시에이징 뉴스(https://www.healthyagingnews.kr)
한국 백세인의 당당한 삶
장수의학자 박상철 교수의 백세인 이야기
일러스트 ⓒ 헬시에이징 뉴스 (AI 기반 제작)
우리는 흔히 백 살까지 산 사람들은 남다른 생의 집념이나 특별한 비결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마주한 백세인들의 모습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곁을 지키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심지어 배우자나 자식마저 먼저 보낸 뒤 홀로 남겨진 고독 속에서도 그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을 대범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노년초월(gerotranscendence)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이면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지켜내려는 강인하고도 눈물겨운 '생명의 의지'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전남 구례군 광의면의 한 마을에서 만난 105세 구상위 할머니는 그 강인함을 몸소 보여주는 분이었습니다. 백 세가 넘은 독거노인이 상당수 있지만 구 할머니의 상황은 유독 특별했습니다. 무릎이 불편해 거의 기어 다녀야 하는 처지임에도 할머니는 혼자만의 삶을 일궈가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세월이 흘러 청각은 어두워졌을지언정, 스스로를 가꾸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밝았다는 사실입니다. "나, 머리 좀 깎아줘"라며 이웃에게 매무새를 부탁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감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할머니의 일상은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로 채워집니다. 여든이 넘은 마을 이장이 매일 들러 먹거리를 챙기고 설거지를 돕는 풍경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고령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 모델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전통사회에서의 향약을 지켜온 두레정신이 살아있는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웃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내가 꼭 죽어야 하는디... 그래서 안 묵어야 하는디..."라며 읊조리는 자조적인 미소 속에는 자신이 오래 사는 것이 이웃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는 깊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덧붙입니다. "그래도 기어서라도 정지(부엌) 가서 묵게 돼." 이 한마디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입맛이 좋아서도, 욕심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부엌으로 기어가 밥을 챙겨 먹는 그 본능적인 행위는,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가장 경건하고도 모진 '의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구 할머니의 사례는 우리에게 '삶의 의지'란 거창한 구호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비록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야 할지라도 스스로 한 끼를 찾아 먹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주변의 도움에 감사하며 자신의 외양을 정갈히 가꾸는 마음입니다. 백세인의 삶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 찾아오는 '살아있음'의 본능에 얼마나 경건하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생명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할머니의 삶은, 모진 목숨을 탓하면서도 끝내 생의 끈을 놓지 않는 생명의 숭고한 승전보와 같습니다.
기고자 / 박상철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박상철
출처 : 헬시에이징 뉴스(https://www.healthyagingnews.kr)